2월6일,국경일( Waitangi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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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뉴질랜드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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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6일은 ‘와이탕기 조약(Treaty of Waitangi) 기념일로서 국경일입니다.
따라서 당사는 2월 6일(월요일)은 휴무임을 알려드립니다.
<와이탕기 조약이란?>
유럽인으로 뉴질랜드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네덜란드 인인 아벨 타스만이다. 그러나 뉴질랜드 땅에 첫 발을 디딘 유럽인은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다.
18세기 말 쿡 선장의 도래 후 고래잡이 어부를 중심으로 한 유럽인들의 왕래가 잦아지다가, 영국을 비롯해 다수의 유럽계 이주민들이 뉴질랜드에 아예 정착하게 되는데 1839년 들어서는 그 수가 2,000명에 이르게 되었다.
반면 그 당시 토착 주민인 마오리들의 인구는 115,000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이민자들의 불법행위가 급증하자 영국 정부는 1833년에 제임스 버스비를 총리 대리로 임명했으며, 1835년에 들어서 경쟁국인 프랑스 인들의 정착이 시작되자 영국은 뉴질랜드가 영국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따라 북섬의 마오리 부족장들을 중심으로 영국의 통치 아래 독립을 선포하게 되었다.
그러나 계속 문제가 발생하자 영국 정부는 좀 더 효율적인 법이 필요하다고 판단, 1840년에 윌리엄 홉슨 선장을 부총독으로 보내 마오리 부족장들과 이른바 와이탕기 조약을 맺게 했다.
1840년 2월 6일에 북섬의 베이 오브 아일랜드에 있는 와이탕기에서 43명의 북쪽 지역의 부족장들이 먼저 서명한 이 조약은, 그 후 전국을 돌며 뉴질랜드 전역의 500여 이상의 부족장들의 서명을 받아 완성되었다.
<조약의 내용과 문제점>
과거 제국주의 시절 영국과 식민지 사이에 맺은 조약 대부분이 사문화된 것과는 달리 이 조약은 현재까지도 뉴질랜드의 법과 사회의 근간으로 남아 있는데, 근대에 들어오면서부터 문구 해석에 있어서 많은 문제들이 노출되고 있다.
영어와 마오리어의 3개 조항으로 구성된 이 조약은 법률가들이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과정을 거쳐 만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두 언어 별 버전에 따라 해석에서도 큰 차이가 발생해 현재도 양측 간에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첫 번째 조항은 통치권에 대한 것인데 영어 버전에는 마오리는 그들의 '카와나탕가'(통치권 또는 통치 직위)를 영국 왕실에 넘긴다고 명시되어 있는 반면 마오리 버전에는 권력을 공유한다고 되어 있다.
두 번째 조항은 '티노랑가티라탕가' 또는 족장제도에 연관되어 있는데, 마오리 버전에는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타옹가'(보물) 소유에 대한 더 넓은 권리를 약속하고 있으며, 영어 버전에는 마오리에게 토지와 임야, 바다(어장), 그리고 다른 부동산에 대한 통제권을 주고 있다. 그러나 마오리 버전에서 사용한 '타옹가' 라는 말에는 언어와 문화 같은 것들의 소유와 보호라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어 문제가 된다.
세 번째 조항에서는 마오리에게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권리를 보호함과 동시에 모든 영국의 것에 대한 권리도 약속하고 있다.
<와이탕기 분쟁 재판소(Waitangi Tribunal) >
와이탕기 조약에서 마오리들은 영국 신민으로서의 여러 권리를 누리도록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상으로는 마오리들은 많은 권리를 침해 당했다.
이는 특히 토지를 사고 파는 과정에서 심각하게 발생해 1860년에는 북섬 중앙부를 중심으로 마오리 토지 전쟁이 대규모로 발생, 수년간 지속되면서 수많은 마오리들이 죽기도 했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많은 마오리 부족들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상실했는데, 그 중에는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친 경우도 많았고 이는 현재까지도 마오리들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하고 있다.
이에 따라 1975년에 뉴질랜드 정부는 와이탕기 분쟁재판소를 설립하였으며, 이 법정에서 마오리 부족들의 요구에 대해 금전 지불이나 땅의 형태로 보상하는 판결들이 내려졌고, 이 보상들은 대부분은 해당 부족민들의 교육과 의료 서비스 사업 등에 투자되었다.
1984년에 당시 노동당 정부는 마오리들이 국가를 상대로 하는 청구소송을 184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도록 허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3년도에 노동당 정부에 의해 입법된 해저, 해안법에 대해 집권당 내에서도 갈등이 일어, 마오리부 장관이던 투리아 의원이 탈당해 새로운 마오리 정당을 창당하는 등, 아직도 이 문제는 뉴질랜드의 역사적 숙제이자 뿌리 깊은 갈등의 소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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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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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당사는 2월 6일(월요일)은 휴무임을 알려드립니다.
<와이탕기 조약이란?>
유럽인으로 뉴질랜드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네덜란드 인인 아벨 타스만이다. 그러나 뉴질랜드 땅에 첫 발을 디딘 유럽인은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다.
18세기 말 쿡 선장의 도래 후 고래잡이 어부를 중심으로 한 유럽인들의 왕래가 잦아지다가, 영국을 비롯해 다수의 유럽계 이주민들이 뉴질랜드에 아예 정착하게 되는데 1839년 들어서는 그 수가 2,000명에 이르게 되었다.
반면 그 당시 토착 주민인 마오리들의 인구는 115,000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이민자들의 불법행위가 급증하자 영국 정부는 1833년에 제임스 버스비를 총리 대리로 임명했으며, 1835년에 들어서 경쟁국인 프랑스 인들의 정착이 시작되자 영국은 뉴질랜드가 영국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따라 북섬의 마오리 부족장들을 중심으로 영국의 통치 아래 독립을 선포하게 되었다.
그러나 계속 문제가 발생하자 영국 정부는 좀 더 효율적인 법이 필요하다고 판단, 1840년에 윌리엄 홉슨 선장을 부총독으로 보내 마오리 부족장들과 이른바 와이탕기 조약을 맺게 했다.
1840년 2월 6일에 북섬의 베이 오브 아일랜드에 있는 와이탕기에서 43명의 북쪽 지역의 부족장들이 먼저 서명한 이 조약은, 그 후 전국을 돌며 뉴질랜드 전역의 500여 이상의 부족장들의 서명을 받아 완성되었다.
<조약의 내용과 문제점>
과거 제국주의 시절 영국과 식민지 사이에 맺은 조약 대부분이 사문화된 것과는 달리 이 조약은 현재까지도 뉴질랜드의 법과 사회의 근간으로 남아 있는데, 근대에 들어오면서부터 문구 해석에 있어서 많은 문제들이 노출되고 있다.
영어와 마오리어의 3개 조항으로 구성된 이 조약은 법률가들이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과정을 거쳐 만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두 언어 별 버전에 따라 해석에서도 큰 차이가 발생해 현재도 양측 간에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첫 번째 조항은 통치권에 대한 것인데 영어 버전에는 마오리는 그들의 '카와나탕가'(통치권 또는 통치 직위)를 영국 왕실에 넘긴다고 명시되어 있는 반면 마오리 버전에는 권력을 공유한다고 되어 있다.
두 번째 조항은 '티노랑가티라탕가' 또는 족장제도에 연관되어 있는데, 마오리 버전에는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타옹가'(보물) 소유에 대한 더 넓은 권리를 약속하고 있으며, 영어 버전에는 마오리에게 토지와 임야, 바다(어장), 그리고 다른 부동산에 대한 통제권을 주고 있다. 그러나 마오리 버전에서 사용한 '타옹가' 라는 말에는 언어와 문화 같은 것들의 소유와 보호라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어 문제가 된다.
세 번째 조항에서는 마오리에게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권리를 보호함과 동시에 모든 영국의 것에 대한 권리도 약속하고 있다.
<와이탕기 분쟁 재판소(Waitangi Tribunal) >
와이탕기 조약에서 마오리들은 영국 신민으로서의 여러 권리를 누리도록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상으로는 마오리들은 많은 권리를 침해 당했다.
이는 특히 토지를 사고 파는 과정에서 심각하게 발생해 1860년에는 북섬 중앙부를 중심으로 마오리 토지 전쟁이 대규모로 발생, 수년간 지속되면서 수많은 마오리들이 죽기도 했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많은 마오리 부족들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상실했는데, 그 중에는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친 경우도 많았고 이는 현재까지도 마오리들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하고 있다.
이에 따라 1975년에 뉴질랜드 정부는 와이탕기 분쟁재판소를 설립하였으며, 이 법정에서 마오리 부족들의 요구에 대해 금전 지불이나 땅의 형태로 보상하는 판결들이 내려졌고, 이 보상들은 대부분은 해당 부족민들의 교육과 의료 서비스 사업 등에 투자되었다.
1984년에 당시 노동당 정부는 마오리들이 국가를 상대로 하는 청구소송을 184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도록 허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3년도에 노동당 정부에 의해 입법된 해저, 해안법에 대해 집권당 내에서도 갈등이 일어, 마오리부 장관이던 투리아 의원이 탈당해 새로운 마오리 정당을 창당하는 등, 아직도 이 문제는 뉴질랜드의 역사적 숙제이자 뿌리 깊은 갈등의 소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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